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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희 노무법인 벽성 대표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보안사령관 전두광은 그렇게 거침없이 외쳤다. 야만적 힘의 논리를 이보다 극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그 야만의 힘은 12.12 군사반란을 혁명으로 둔갑시켰고, 가담자들은 이후 모든 권력과 이권을 독식하며 줄기차게 나눠먹는다. ‘우리가 남이가’식 독식과 배제로도 부족해 5.18 광주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증오의 씨앗까지 뿌렸다. ◇ 진짜 서울의 봄을 이긴 또 다시 그들만의 봄 인간은 자신의 삶, 자기세상을 끝없이 개선해가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그런 욕망이 세상을 진보시킨다. 가까이는 87년의 6월항쟁, 2017년 대통령탄핵의 역사가 그랬다.권력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다시피 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조차 그런 욕망들의 씨앗은 싹트고 있었듯이 진짜 서울의 봄을 되찾기까지 인내로써 저항했던 시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욕망들이 득세할 때 역사는 또 얼마나 후퇴했던가. 임진왜란, 일제강점, 군부독재의 쓰라린 역사가 그랬다. 사회시스템은 중심을 잃고 권력의 사유화는 기승을 부린다.소수에 집중되는 권력의 독점은 비단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정치, 경제, 노동, 문화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며 결국은 우리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교육, 육아환경까지 위협한다. 책임과 의무를 권위로 잘못 이해하면 그 의무는 권력이 되고 독점의 대상이 된다. 그 동안 양당의 정치권력 나눠먹기에서 적당히 눈치봐가며 변신을 거듭해왔던 검찰이 권력의 중심무대로까지 등장하는 기이한 일까지 벌어졌다.후진 국가에서나 있을법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의 악몽이 채 가시지도 않았다.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중립을 위장해왔던 그 사법, 준사법 권력이 이제 그 형식조차 아예 내팽개치고 권력쟁투의 전면에 나선 모양새다.이제 정치권에서 역량과 실력 경쟁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상대를 제압해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영화 속 전두광식 약육강식이 극성을 부릴 뿐이다. 이처럼 권력의 사유화가 극성을 부리는 동안 노동•민생 현장에서는 신음소리조차 잦아들고 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발의한 간호법, 양곡관리법에 이어 노란봉투법, 방송3법까지 민생현안들을 보란 듯 줄줄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특히 노란봉투법의 거부는 법률가로서 자기모순적인 행위다. 노조법상 교섭의무를 질 사용자 범위를 규정한 노조법 2조는 대법원 판례 법리를 입법화한 것이기 때문이다.대통령이 직접 지명했던 신임 조희대 대법원장조차도 후보 청문회에서 ‘노동자가 실질적 권한을 가진 진짜 사용자와 교섭할 수 있도록 사용자 범위를 넓힌’ 개념이라면서 위헌적 요소가 없고 그런 법리가 이미 확립돼 있는 만큼 지지한다고 분명히 말한 그 조항이다. 이렇듯 뻔한 진실조차 권력의 손에서 무시되는 민생현장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 곳곳에 드리워진 양육강식의 생태계 산업현장에서는 하루하루 쓰러져가는 목숨들 숫자가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지만 좀처럼 산재공화국 오명에서 벗어날 기미도 없다.하루가 멀다 하고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젊은 생명들의 안타까운 뉴스에도 담담하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당장 응급처치와 함께 즉각적인 방지 대책이 나와야 한다.그러나 정부는 대책도 없이 그저 50인 미만 사업장의 중대재해처벌법의 유예의 뜻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권력층 인사들의 자녀나 가족이 그렇게 죽어나가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여유를 부렸을까?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력을 부여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 목숨을 담보한 의사들의 극단적 이기주의 행태도 이미 용인의 수준을 넘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간호인력 노동의 착취 행태와 구조, OECD 기준 최하위권의 의사 인력으로 의료체계를 움직이는 나라, 그로 인해 현재 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물론이고 향후 의료체계에 보다 심각한 문제가 예상됨에도 그들은 하늘이 준 권력이라도 가진 듯이 행동한다.눈앞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살인이 아닌가.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력을 부여했는가. 어째서 감히 자신들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먹고사는 문제와 직접 연결된 산업생태계는 또 어떤가. 최근 카카오 등 IT 기반의 기업들이 벌이는 온갖 불공정, 착취 행태는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독점화된 거대 플랫폼들이 택시, 배달, 골목상권까지 곳곳을 누비며 약자들 생태계를 집어삼키는 야만의 힘을 보노라면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말이 진리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수많은 궁색한 변명들이 무심하게 어른거린다. 배달, 숙박, 금융, 택시 등 플랫폼 기업들이 기형적으로 급성장하게 된 것은 IT 기업을 육성하겠다면서 치밀한 준비도, 생각도 없었던 정부의 무능과 잘못된 정책 방향이 맞물려 있다.바로 공유경제 이슈로 시끌벅적했던 문재인 정부로 거슬러간다. 당시 가상•증강현실, AI, 생명공학 등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의 세계적인 바람이 일었고 정부는 막연한 불안감에 쫒기 듯 공유경제를 강행했다. 실은 공유경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결국 택시노동자 3명이 연달아 분신자살하는 불행한 사태로 이어졌다. 새로운 기술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정부가 체계적인 준비도 없이 대표적 IT 기업인 카카오에 의지해 그들이 내세운 공유경제에 힘을 실어 그대로 밀어붙였던 것이다.그런 취약한 기반의 생태계로 어떻게 기술혁신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세계적인 ICT 기업들의 미래형 기술 발전 양상과도 전혀 동떨어져 성장해버린 지금의 문어발식 카카오의 시작지점은 그렇게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삶의 터전이 무너져가고 있던 택시종사자들의 희생만 강요당하고 새로운 생태계로 이행해갈 정부의 지원정책은 전무했다. 상생자금을 출연하도록 유도하는 일도, 충분한 논의의 시간과 과정도 완전히 차단됐다.이것이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당시에 섬세한 정책조정과 논의가 충분히 진행됐더라면 플랫폼 경제가 이지경이 되었을까? 의욕만 앞섰던 정책결과에 대해 반성하는 이도 없고 그런 무책임한 정부 행정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 약육강식의 토양에서 아이들은 성장을 멈춘다 이런 약육강식 생태계가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이미 시시각각 단골 뉴스가 되어버린 지도층 자녀들의 학교폭력, 입시비리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더욱 심각한 것은 악랄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 부모들의 문제 해결 방식들이다. 자신들의 자녀를 악마로 키워낼 생각인지 묻고 싶을 정도다. 누군가의 능력을 방해하고 가로채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이미 권력 나눠먹기를 훈련하는 훈련장과도 같다. 친구를 이기지 않으면 내가 죽는 구조다. 성공하면 혁명이 될 수 있다는 바로 그 논리다.그렇게 길러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오면 진정한 실력경쟁이 가능할까? 질투와 권모술수로 상대를 눌러 이기는 방식이 더 익숙할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의 방향과 중심에 정작 있어야할 인간은 없고 권력을 향한 욕망들만 넘쳐나고 있다.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눈 뜨면 볼 수밖에 없는 정치권과 정부 행태가 그런 욕망들의 근원지다. 그럼에도 그런 행태에 대항할 마땅한 대항권력을 갖지 못한 우리사회의 무기력한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속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이미 지속가능성에 제동이 걸린 사회다. 집단자살 사회라는 수식어로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속가능성의 생태적 기반이 출생과 육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그럼에도 50년 후의 인구가 현재의 2/3로 급감할 것임을 예측하면서 해법은 베이비시터. 주택문제 등 눈앞의 단편적 대책에 머물러 있다. 출산•육아 정책은 일하는 부모들과 연결된 문제다. 다음 세대의 생명력까지 소진시키고 있는 지금의 노동 방식을 어떻게 재배치해 육아의 질을 개선해갈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육아기 이후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환경도 중요한 문제다. 즉 아이를 키운다는 의미는 한 인간이 살아갈 전체 생애를 고민하게 하는 중대한 일이다.그런데 이런 약탈적 사회 생태계는 눈감은 채 또 다시 값싼 이주 노동자들의 열정페이로, 청년들 주택대출과 같은 얄팍한 시각으로 문제를 대하고 있다. 누가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겠는가. ◇ 또 다른 약탈현장인 전관예우와 이해충돌 권력들, 수요자 중심조직으로 거듭나야 그렇다면 이런 약육강식이 점점 더 강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검찰, 법원 등 국가조직들에서 벌어지는 전관예우에 있다. 어이없게도 이행해야할 ‘의무’가 ‘권력’으로 둔갑해버린 기현상의 시작지점이다.LH공사에서 드러났던 전관문제, 이해충돌 등 공공기관들의 해묵은 탈법적 관행들도 충격적이다. 공고한 카르텔을 포기할 생각조차 없는 그들이 금속노조의 고용세습 관행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 몰염치함에 그저 할 말을 잊는다. 이해충돌 방지의무를 무력화시키는 카르텔 악습과 자기밥그릇 챙기는 모든 관행과 법령을 새롭게 뜯어고치지 않으면 건전한 경쟁 생태계는 살아날 수 없다.국민의 세금이 기반인 모든 조직들은 말 그대로 대국민 행정서비스조직이지 그들끼리 잘 해먹으라고 부여해준 권력조직이 아니다. 검찰, 법원, 의료, 교육, 노동 등 모든 조직의 운영원리가 국민이 주체가 되는 철저한 수요자 중심의 기능으로 거듭나야 한다. 온갖 후진적 특혜를 감싸 안고 있는 국회는 어떤가. 이미 국민의 대표기관이라 할 수도 없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총선을 앞둔 지금 밀실에서 또 다시 국민이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거제 개악을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민의를 왜곡시키는 선거제도를 악용해 자기 당에 유리한 쪽으로 수 싸움이나 벌이는 퇴행적 행태에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이다. ◇ 사유능력을 상실한 사회에 미래는 없다 지금의 우리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권력집단들을 지켜보는 관객이 아니라 주체들이다. 그리고 방치했던 모든 것들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주체들의 사유이다. 사유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들로 정치가 굴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이자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개재판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자행한 엄청난 악행에 대해 죄의식은커녕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당시 법을 성실히 이행한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발견한다.우리사회를 둘러싼 모든 제도, 관행, 법령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행동할 때의 그 무의식적 행위들에서 수많은 아이히만들이 탄생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규율사회의 착취방식을 지나 스스로 효율적 성과를 내리도록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 이 시대의 위험성을 말했다. 약육강식 강화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정보기술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이다.‘관계’가 아닌 ‘연결’로 대체된 지금의 디지털 사회에서 우리의 무의식적 행위들 뒤에 ITC 기업들의 알고리즘이 작용한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역사에서 기술 권력에 대항할 길항권력이 없을 때 인간이 얼마나 처참해졌는지도 방대한 역사적 사실로써 보여주고 있다(권력과 진보,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 김승진역). 그 길항권력을 만들어갈 첫걸음이 바로 사유의 확장이다. 최고 권력자들이 어떤 거짓말을 하든 그저 보호하기 급급한 수많은 아이히만들, 규정된 법체계를 무시하면서까지 권력자의 상명하복을 강요했던 채상병 사건, 이태원 참사, 세계 잼버리대회, LH 순살아파트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진정 무엇을 사유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악행들은 특별한 의도에서 벌어질 때보다 일상에서 사유가 정지될 때 더 많이 일어난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흐르는 내내 나도 그들도 넋 높고 화면만 바라보았다. 비록 영화 한편의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모처럼 스스로에게 사유할 시간을 허락했다.불과 몇 십 년 전 역사였고 지금도 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한국사회의 야만적 정치권력의 행태. 잠시 상념에 젖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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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2▲ 주요섭 생명운동가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문명전환’정치는 ‘정권교체’정치나 ‘정치전환’정치, 혹은 ‘체제전환’정치와 비교될 수 있다. 정권교체정치에게 진리는 현 정권의 퇴출이다.그러나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논외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전환정치는 정권이 아니라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두 개의 거대정당 외에 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다. 정치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구축된 민주화세대와 비-민주화세대의 세대 구도, 영남과 호남의 지역 구도, 보수와 진보의 이념 구도에 의한 정치질서의 고착을 혁파해야 한다고 믿는다.체제전환정치 역시 정치전환을 이야기하지만, 완전히 결이 다르다. 이는 급진적 진보정치의 논리로써 기후급변과 극단화된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자본주의로 보고 그 철폐를 지향한다. ◇ 2024년, ‘문명전환정치’의 원년 문명전환정치 역시, ‘정치의 전환’을 고대한다. 체제전환정치의 문제의식에도 적지 않게 공감한다. 그러나 문명전환정치는 이들과 또 다르다. 문명전환정치는 생태적·사회적 파국의 근본 원인을 근대 서구문명으로 본다.그리고,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개인’을 전제로 하는 근대 정치체계에 의문을 제기한다(물론, 왕정의 철폐와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근대정치의 엄청난 성취이다)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과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3월 대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일정은 한국에서의 ‘문명전환 정치’의 출발점이다. 팬데믹과 기후재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참혹한 전쟁, 그리고 성큼 다가온 AI시대의 경험이 정치화되는 첫 번째 시기이기 때문이다.향후 몇 년은 서구적 근대문명 이후의 정치를 실험하고 경험하는 최초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문명전환’ 및 ‘새로운 문명의 태동’이 정치적 소통의 주제로 등장하고, 문명전환을 표방하는 정치결사체가 나타날 수도 있다.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비-인간 존재의 정치를 제기하고, 근대적 원자적 민주주의를 넘어 깊은 마음의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도 있다. ◇ ‘위기’의 징후가 아니라 ‘종말’의 징후 ‘전쟁 같은 삶’은 단순히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가속되는 전 지구적 기후재난과 유라시아와 중동에서의 살육과 전쟁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는 체계의 ‘자기파괴’로써 종말의 신호이다.서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제로성장 및 저성장과 트럼프 현상 및 정치적 무능력은 그 증거 중 하나일 뿐이다. 리셋(reset), ‘다시 개벽’ 아니고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경험하는 기후급변과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 정치체계의 무능력은 ‘위기’의 징후가 아니라, ‘종말’의 징후이다.‘위기’는 체계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개념이다. ‘종말’은 기존 체계의 ‘한계’를 지시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이 망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 그 자체는 소멸될 수 없다.여기서 ‘종말’이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들은 지배적 지위를 향해 치열하게 ‘경합’ 중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론’이 아니라, ‘종말론‘이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 선진국이 되는 그 순간, 역설적으로 서유럽이 경험하는 정치체계 및 경제체계의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일부 일본 언론이 말하는 “대한민국은 지금 정점이고, 이제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피크 코리아(peak korea)’론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명전환정치의 관점은 이를테면, 체제전환정치의 탈성장론(de-growth)과 명백하게 다르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을 이미 저성장-제로성장시대에 진입했다.자본주의가 끝을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만이 아니다. 단 미국만이 패권국가로써 예외적으로 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념적인 구호를 앞세운 ‘탈성장 체제전환론이 아니라, ‘포스트성장(post-growth)’의 관점에서 성장시대 이후의 새로운 경제형식의 태동과 작동을 관찰하고 발달시켜야 할 때이다. ◇ 새 문명들의 태동과 생명-문명의 염원 그렇다면, 문명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역사를 통해 경험하듯이, 그것은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통한 ‘배치의 재-배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그러므로 무엇보다 삶-사회-문명의 ‘변이’들이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들은 이미 치열하게 ‘경합’하면서 동시에, ‘융합’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AI-로봇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변이들이다.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포스트 근대문명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문명들’이 태동하고 있다.(문명은 항상 문명들이다. 근대서구문명은 다만 지배적 문명이었을 뿐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하나의 문명적 변이가 생명-문명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생명’을 중심가치로 하는 문명의 태동을 목격한다. 일본의 재난영화들의 생명사상과 테크노-애니미즘, 라틴 아메리카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와 다(多)-자연주의, 전 세계적인 샤머니즘 열풍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일본이 주목된다. 복잡계이론에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현장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일본은 적절한 예가 되고 있다.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란 다시 말하면, 새로운 문명의 싹이 트는 시간이다.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일본의 재앙은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30년의 저성장, 제로성장은 성장시대 이후 삶·사회의 형식을 발명하도록 강제하고 있다.후쿠시마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핵발전소 폭발사고와 같은 대재난은 일본사회의 탈-이념을 가속시키고, ‘생명’ 중심 사회들의 출현을 자극했다. 포스트 근대문명 사회의 미래를 일본의 지역사회와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한다. 한국에서도 ‘생명’을 키워드로 하는 문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생율은 ‘생명의 저항’의 징표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 생명이 기존의 사회적 체계를 견딜 수 없다면, 떠날 수밖에 없다. 종말하는 옛 사회의 틈새에서 새로운 사회를 발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한살림과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같은 전통적인 생명운동만이 아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는 2022년 ‘생명문명’을 선언했다. MBN의 대표적인 간판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의 장기흥행도 예사롭지 않다.9월 초 보은에서 열린 ‘동방마녀축제’와 11월 초 해남에서 열린 ‘대동굿’도 문명전환의 신호로 읽힌다. 전라북도는 2021년 이른바 ‘생태문명전환조례’를 통과시킨 바 있다.개발의 논리 속 보여주기식 입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이른바 ‘좋은’ 일자리의 부재와 높은 진입장벽은 탈-정규직과 탈-직업을 강제한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의미심한 현상은 탈-사회화와 아나키적 ‘은둔’이다. 우리의 척도는 ‘생명’이다. (기존의 유기체적 생명 개념을 재구성하기 위해 ‘생/명’이라는 기호를 사용할 수 있다.) 이때 생명은 인간생명이나 유기체적 생명에 머물지 않는다. 신체적이면서도 거룩한 ‘물질/비물적’ 생명이며, 먹혀야 먹을 수 있는 ‘역설’의 생명이다.또한 살아나고 살아지고 사라지는 ‘순환’의 생명이다. 명철한 ‘이성’의 생명이면서 동시에, 감응하는 ‘정동’의 생명이다. 아름다운 감성의 생명이면서 동시에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공허의 생명이다. 생명의 문명은 생명감(生命感)과 생명관의 급진적 전환을 전제한다. ◇ 살림정치2.0: ‘그늘’을 정치화하기 오늘날 소통되고 있는 ‘생명정치’ 개념은 푸코와 아감벤 등과 같은 유럽의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권력에 의한 인간생명의 훈육과 통제(푸코),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벌거벗은 생명’, 아감벤)를 다루었다.반면, 들뢰즈-가타리에 영향을 받은 자율주의와 정동이론의 ‘생명정치(삶정치)’는 인간생명 개념과 유기체 생명 개념을 넘어서 체계에 저항하는 생명의 잠재력에 주목한다.‘권력’의 생명정치에 맞서는 ‘생명’의 생명정치인 셈이다. 최근 신유물론의 생명정치는 인간 생명을 넘어서 인간 너머의 생명, 나아가 생명의 조건으로써 비-생명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사물정치(cosmopolitics)’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생명정치는 자율주의와 정동이론의 생명정치론과 신유물론의 사물정치 개념을 참고하면서, 동아시아적이고 한국적인 생명 사유에 주목한다.특히 1980년대 이후 김지하를 비롯한 한국 생명운동의 생명정치 담론에 유의하여, 살리고-죽이는 ‘역설’의 생명정치, 기쁨의 사건을 사회화하는 ‘신명’의 생명정치를 발명하고자 한다.나아가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의 경계를 넘나드는 우주생명 정치로의 확장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는 담대한 우주론과 새로운 인간관 및 문명론을 포함한 ‘다시개벽정치’로 연결된다. 우리는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이 활기차고 신명나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생산하는 ‘생/명(生/命)’ 살림정치를 염원한다. ‘활생(活生)·활명(活命)’의 세상을 꿈꾼다.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닌, 비인간을 포함해 삶을 나누는 ‘공생체’로의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이라는 매체를 통해 역동적으로 소통되고 생산될 수 있다.우리가 ‘권력’과 ‘정치’를 이야기하려는 이유이다. ‘탈성장사회’가 아니라, ‘포스트성장사회’를 강조하고, ‘고양이당’을 상상하고, ‘직업’이 아닌 ‘생업(生業)’의 일자리 패러다임을 실험하는 이유이다. ‘직접민주주의’와 함께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를 논의하려는 이유이다. ‘개벽정치’의 서사를 창안하려는 이유이다. 생명-살림정치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 ‘살림정치’가 선포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2011년 10월의 일이었다. ‘살림정치여성행동’이 출범하였다.그해 12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이듬해 총선을 앞둔 상황이었다. 살림정치여성행동은 “민주주의와 성평등 그리고 생태 평화가 존중되는 생활정치, 살림정치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살리는 정치’, ‘돌보는 정치’, ‘나누는 정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살림정치의 가치를 확산하는 살림포럼 운영과 후보인증 사업, 시민정치운동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살림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특정후보를 지지했고, 특정정당과 연계되면서 살림정치는 퇴색되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지만, 사상적 한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 ‘가치’ 중심정치의 한계였다.결정적으로 섬세한 ‘세계감(世界感)’과 담대한 ‘세계관(世界觀)’, 그리고 섬세하고도 담대하고 아름다운 ‘세계상(世界像)’의 부재라는 한계였다. 김지하의 ‘그늘’의 은유는 살림정치의 차원변화에 큰 영감을 준다. 2004년 김지하는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단체를 창립하며,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를 화두로 던진다. 우리는 그것을 “그늘이 문명을 바꾼다”, “그늘이 정치를 바꾼다”로 다시 읽는다. 이를테면 생명정치는, 살림정치2.0은, 이를테면, ‘그늘의 정치’다. 그늘진 몸과 마음에 유의하는 정치다. 이때 그늘은 ‘그림자’와 구별된다. 그늘은 ‘사각지대’와 다르다. ‘비가시적인 것’에 유의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생명정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 죽은 것, 죽음조자 부재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살려내야 한다. 바이러스와 미생물과 균류들로부터 외계인과 우주의 암흑물질까지. 인적 없는 산중의 요양시설과 반지하의 세 모녀가 그들이다.가자지구의 지하동굴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늘이 고통의 그것만은 아니다. 깨알 같은 즐거움과 가을 하늘 같은 티없는 평화의 순간도 있다. 인간과 사회와 우주의 신산고초(辛酸苦楚)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어떻게 권력과 연결할 것인가? 어떻게 ‘그늘’을 정치화할 것인가? 어떻게 ‘흰 그늘’의 빛나는 신명(神命)의 순간을 정치화할 것인가? ◇ 어떻게 우리 자신을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의 전략적 목표는 기존의 정치적 구도, 특히 진보/보수, 좌파/우파의 구도를 흔들고 문명전환정치의 ‘틈새’를 만드는 것이다. 판을 흔들어 기존의 구도를 균열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전환정치 ‘연합’이 불가피하다. 이미 ‘정치전환’을 내세우는 수많은 정당과 정파들이 기존의 정치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이른바 ‘제3지대’를 명분으로 연대와 연합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고 있다.생명정치도 여기에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명정치는 복수(複數)의 정치를 전제한다. 정치는 ‘정치들’이다. 수많은 전환정치들이 있다.진보정치와 보수정치를 비롯해, 젠더정치, 노동정치, 녹색정치, 디지털정치 등 수많은 정치들이 경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택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기준은 ‘좌/우의 구도’에서 벗어나기, ‘진보/보수의 구도’ 흔들기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좌파/우파 정치적 구도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한국 역시 분단으로 인해 그 어느 나라보다 첨예한 좌파/우파의 구도 속에 존재한다.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실존적 이념적 피해의식이 깊이 각인되어 크다. 그리하여, 지금껏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라고 부르지 못하고, 좌파를 좌파라고 호명하지 못했다.이는 역설적으로 좌파/우파 구도를 넘어설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생명정치는 여기서 촉매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정치는 그들 사이에 차별성과 그에 걸맞은 세(勢)를 실질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풀어 말하면, ‘주머니 속 송곳되기’.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생명정치도 정치체계라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연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문명전환’정치는 ‘정권교체’정치’와 ‘정치전환’정치와 다르고, ‘체제전환’정치와도 구별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합(合)만으로 차원변화를 이룰 수 없다.생명정치가 문명전환정치를 선도하며 ‘주머니 속 송곳’이 되기를 기대한다. 기존의 ‘평면적 구도’를 뚫고 돌출하는 ‘수직적 돌파’의 힘을 보여주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구도의 발명을 열망한다. 그것은 기후재난시대의 라이프라인(life-line)과 같은 실제적이면서도, ‘초월적 돌파’의 힘을 가진 정동적이고 영성적인 격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미학적’이고 정치적인 탁월한 기예(技藝)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주머니 속 송곳 되기처럼, 우리는 스스로 정치체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심금(心琴)을 울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2024년 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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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2▲ 윤호창 상임이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출처=복지국가소사이어티]‘행복’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철학도, 정치도, 경제도 결국 개개인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에피쿠르스나 제레미 벤담처럼 행복을 자기 철학의 주요 화두로 가져간 철학자들은 많았지만, 행복은 주관적 요소가 강해 사회정책이나 국가운영의 철학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많았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성장과 번영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전제하에 시장경제를 전면화시켰지만, 대다수 개인들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성장과 물질적인 번영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행복감은 증진되지 않았고 오히려 풍요속의 빈곤과 불행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에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느낀 국가에서는 ‘행복’을 주요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시민들의 행복을 측정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해왔다.금세기에 들어 이런 활동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2012년부터는 UN에서도 3월 20일을 ‘세계 행복의 날’을 정하고, 전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국가별 행복순위를 평가해 발표하고 있다. 이제 10년을 넘긴 국가별 행복도 조사에서 언제나 1,2등을 다툰 나라는 덴마크와 핀란드였다.덴마크와 핀란드가 각각 5번씩 1위를 차지했고, 덴마크와 핀란드를 포함한 북유럽 5개국(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는 항상 10위안에 랭크되었다. 대한민국은 거의 60위 안팎으로 중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 북유럽이 행복사회가 된 까닭은? 지난 10년간의 검증활동을 통해 보편적 복지국가가 시민들을 행복의 길로 이끄는 지름길임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북유럽이 복지국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1921년부터 76년까지 4년을 제외하고 50년 이상을 연속 집권한 스웨덴 사민당의 역할을 꼽지 않을 수 없다.스웨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사회의 시스템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일관된 노력을 보여야만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다.스웨덴 사민당의 성공적인 활동이 이웃 북유럽 국가들에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북유럽 복지국가 모형인 노르딕 모델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촛불시민혁명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단명은 두고두고 역사의 회한으로 남을 것 같다. 87년의 6공화국 체제가 만들어진 이후, 보수와 개혁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 사회는 분열되고 국력은 소진해가고 있다.국가의 비전, 정책의 일관성과 연속성이 사라진 오늘날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이후에 20년·30년집권을 운운했지만, 준비도 실력도 자세도 되어 있지 않았다. 북유럽의 노르딕 모델을 만든 것은 스웨덴 사민당과 탁월한 정치가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수 백년간 북유럽에 흐르고 있던 문화가 있었기에 사실 가능한 일이었다.저변에 흐르는 문화적 코드를 읽지 못한다면 우리는 북유럽 읽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북유럽의 문화코드를 읽기 위해서는 덴마크에서 출발한 그룬트비의 민중교육사상과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난 협동조합을 봐야 한다. 덴마크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유틀란드 반도의 영토를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하자, 그룬트비는 덴마크 사회와 교육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지적했다. 소수의 엘리트를 지향하는 귀족적이고 허구적인 교육이 아니라, 민중의 삶에 기초한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을 주장하고 평민들의 연대와 협력으로 만들어가는 협동조합의 활성화를 제안했다.당시 위기의식에 놓여 있었던 덴마크 사회는 이에 호응했고 인근의 북유럽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오늘 북유럽을 만든 보다 근원적인 힘은 평민교육과 협동조합에 있다고 볼 수 있다.물론 역사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공평한 분배를 강조했던 바이킹의 문화와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대화를 강조했던 루터교가 북유럽에 자리잡은 것도 한몫 했다.이런 역사적인, 문화적인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을 20세기 노르웨이 작가 악셀 산데모세는 ‘얀테의 법칙’이라는 말로 북유럽의 평민문화를 설명했다. 얀테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2.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3.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4. 당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5. 당신이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6.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7.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8. 남들을 비웃지 마라.9. 누군가 당신을 걱정하리라 생각하지 마라.10.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얀테의 법칙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 평등한 만인’을 지향하는 문화가 저변에 흐르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와는 달리 사회민주주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크게 흔들림이 없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만명의 자유 vs 만인의 자유 북유럽 모델을 많은 이들이 선망하지만, 한국 사회에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역사문화와 정치경제적 환경들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수입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수입 자체를 완강하게 저항하는 세력들이 많기도 하지만. 우리는 북유럽 모델을 참고하면서 우리 토양에 맞는 실질적인 모델을 실험하고 확대해 나가야 한다. 지난주에 수능이 끝났지만 한국사회를 망칠 주범으로 교육을 꼽는 이들이 많다. 현재와 같은 교육시스템으로는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는 어렵다.흔히 한국의 교육을 19세기 교육관료들이, 20세기 학교에서,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전면적인 전환이 없이는 우물안 개구리들만 키우거나, 알지도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는 열탕 속 개구리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정치가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는 것도 마찬가가지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이 많은, 기존의 대의제로 선출된 권력엘리트들에게 담대한 미래 비젼과 깨끗한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 백년하청에 가깝다.비단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엘리트 대의권력의 해악은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극우 파시즘이 부상하는 것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와 정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한국사회의 정치는 해악 정도가 좀더 심할 뿐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나 아일랜드의 시민의회가 같은 정치실험이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회가 제대로 된 혁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만명만 자유롭고, 만인은 불행한 사회’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은 말만 하면 수십 번씩 자유를 언급하고 많은 이들이 비판하지만, 필자는 그의 자유론을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패밀리들이 속한 만명의 자유론이기 때무이다.개인으로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한 국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서는 차마 가져야 할 자유론이 아니다. 대통령은 만명이 아닌 만인의 자유를 염두에 두고 비젼을 제시하고, 국가를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사회가 시도해야 할 것들 – 마을대학, 지역정당, 시민의회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만든 힘은 소수의 정치엘리트가 아니라, 평민학교·민중학교에서 교육받은 이들이 협동조합 등을 통해 보통의 시민들이 만들어간 것이라 봐야 한다.물론 타게 엘란데르, 올로프 팔메 같은 탁월한 정치가들이 화룡점정의 역할을 했지만, 위대한 평민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북유럽은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평민들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행여나’ 해서 기대하지만, ‘역시나’ 하는 행태를 수 십 년간 되풀이 해왔다. 대통령도, 좌우파를 막론하고 선출된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언제나 역시나였다.북유럽을 통해 배울 핵심적인 것은 얀테의 문화 속에 스며있는 ‘자유로운 개인, 평등한 만인’의 정신과 보통의 시민들이 이를 실천하고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마을대학협동조합,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지역정당네트워크, 전국민회와 같은 뜻있는 개인, 단체들이 ‘마을대학, 지역정당, 시민의회’란 화두로 걸고 풀뿌리 지역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기대할 만한 것이 없거나 마음 둘 만한 곳이 없는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시작해볼 만한 일이다. 왜냐면 복지국가, 행복사회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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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 북부오스트리아의 산학연을 통한 지역산업 발전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 린츠(JKU-Johannes Kepler University) Altenbergerstraße 69, 4040 LinzTel : +43 732 24680www.jku.at 방문연수오스트리아린츠 ◇ 역동적이며 개방적인 젊은 대학, 요하네스 케플러 린츠대학○ 연수단의 첫 번째 방문지인 요하네스 케플러 린츠대학(이하 린츠대학) 방문은 국제협력 담당인 졸탄 마이어(Zoltan Major) 교수의 인사로 시작했다.린츠대학의 브리핑은 알렉산더 에기드(Alexander Egyed) 부총장이 대학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하였고, 그 후 노버트 뮬러(Norbert Müller) 학장이 R&D에 대해 설명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연수단을 맞이하는 졸탄 교수[출처=브레인파크]○ 오버외스트라히는 오스트리아 전체 인구의 1/10이지만, 생산의 1/4을 차지한다. 그 안에 있는 린츠대학은 유럽에서도 상당히 활동적이고 젊은 대학으로 역사가 50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광범위한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단지로도 유명하다. 린츠대학은 유명한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린츠대학은 오스트리아의 다른 대학과는 달리 의과대학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단과대학에 포함되어 있다. 단과대학은 공과대학, 자연과학대학, 법과대학, 사회과학대학 등이 있으며, 그 아래에 60개의 학과가 있다.현재 학생 수는 약 2만 명이며 교수는 약 300명, 풀타임 연구교수가 120명, 직원 수가 2,700명 정도 된다. 최근에는 로봇과 사이버 분야로 새로운 교수진과 학생이 영입되고 있다.○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통한 파트너대학이 150개인데, 5개 대륙을 통틀어 50개국에 달한다. 이 중 17%는 외국인학생이다. 따라서 1,000개 이상의 영어수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18개 학위프로그램이 영어로 딸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융합분야에 대한 집중 연구와 오픈 이노베이션 체계 구축○ 린츠대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 R&D이다.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을 딴 오스트리아의 노벨상인 ‘비트겐슈타인상’을 이 대학 교수가 두 차례나 수상했다. 이 곳은 의학과 물리학의 접목, 플라스틱과 의학의 접목 등 새로운 융합분야를 많이 연구하고 있다.○ 수년 전에 설립한 대학연구기관인 LIT Factory는 ‘강력한 인프라를 다양한 연구자가 함께 사용하자’는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이 곳은 다양한 학문의 공동연구시설이자 오픈 이노베이션센터이다.○ 린츠대학은 경제와 바로 직결되는 ‘실천하는 대학’을 지향한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실시하는 경쟁력센터(Competence Center)가 있어, 대학의 연구 노하우를 바로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산학협력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넓고 복잡하다. 공학과 의학을 나노기술로 연결하여 인체에 정확하게 투입하는 기술, 폴리머와 3D 기술의 융합, 자율주행차, 수학적인 미지의 영역에 대한 연구 등 다양하다.▲ 요하네스 케플러대학의 조직도[출처=브레인파크]◇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을 장벽 없이 연구하고, 혁신학과를 개설○ 두 번째는 화학과 교수인 뮬러 학장이 공학대학과 자연과학대학에 대한 소개를 해주었다.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을 함께 장벽 없이 넘나들며 연구하는 것을 지향한다. 캠퍼스는 사이언스파크 캠퍼스와 TNF의 두 개로 나뉜다.○ 최근 영어를 사용하는 학과가 증가하고 있다. 학사과정은 거의 대부분 독일어로 진행하는데, 생체정보학과(Bioinformatics)와 화학과(Chemistry)를 포함한 3개학과는 영어로 수업하고 있다.현재 인공지능(AI), 기계공학(Mechanical Engineering), 의료공학(Medical Engineering)이라는 3개의 새로운 혁신학과를 계획 중이다.○ 작년에 교직을 이수하는 학과를 분리시켰음에도 학생 수는 지난 5년간 증가하고 있다. 가장 경쟁력이 높은 학과는 메카트로닉스(Mechatroincs)이고 그 다음 분자바이오화학, 바이오인포매틱스, 생화학이 점차 상승세에 있다.○ 석사과정은 영어과정이 훨씬 많다. 폴리머 테크놀로지가 가장 강한데, 플라스틱과 생산 부분 등 다른 학과도 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일부 학과는 잘츠부르크대학 등 다른 대학과 연계한 학과를 운영하기도 한다.◇ 4차 산업혁명 준비를 위해 3개 공과대학 공동으로 미래공장 구축○ 마지막 브리핑을 진행한 마이어 교수는 헝가리 출신으로 플라스틱 폴리머 분야의 국제관계 코디 역할을 하고 있다. 학사과정은 독일어, 석사 및 박사과정은 거의 영어로 진행된다. 안타깝게도 한국학생은 아직 없다고 한다.○ 미래공장(FTI)은 4차 산업혁명을 위해 비엔나공대, 그라츠공대, 린츠공대가 공동참여하고 있다. 린츠에 있는 곳이 LIT Factory인데, 세 개의 큰 축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다.○ 그 축은 △스마트생산(Smart Production) △경량소재(자동차와 항공기 소재, 의학과 로봇 소프트웨어) △리싸이클링과 업싸이클링으로 구분된다.플라스틱의 단점 중 하나가 환경적 측면의 해악성이어서 리싸이클링 분야를 연구에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역에서 생산과 의학, 항공, 자동차 부품, 디지털화, 데이터 작업 등 다양한 분야를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시스템 속성의 디지털화도 연구한다.○ LIT Factory의 규모는 2,300㎡이다. 로봇공학, 의학, 메카트로닉스, 자동차부품 등의 연구공간으로 쓰고 있다. 대기업과 산업계와 접촉하여 펀딩을 받는 COMET이라는 프로그램을 수행한다. COMET에 투입되는 연구자금은 2천만유로 정도이다.이 자금으로 시뮬레이션을 토대로 한 사물인식시스템, 소재와 메카트로닉스 및 인포매틱스를 결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폭스바겐을 위한 오픈 하이브리드 특별연구도 실시 중이다.○ 국제적으로는 14개 파트너 국가와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다. 파트너기업은 주로 중국 및 일본에 있다. 실제로 재정을 받고 연구를 진행한다.한국과도 협력관계를 원하는데 그 전제조건은 학생을 받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소미’라는 한국학생이 ‘자이언트’라는 기업에 가서 일한 적이 있는데, 상호 문화적인 갈등이 조금 있었다.하지만 후에는 파트너가 되었고, KIAT뿐만 아니라 KISA와의 컨택에도 도움을 주었다. 기업, 학생 모두와 상호관계를 통해 협력이 이루어진다.□ 현장시찰◇ 최신 설비를 갖춰 연구 발전을 돕는 연구소○ 연수단은 연구소 담당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대학 내 여러 개의 연구소를 시찰하였다.○ [프로토타입 테스트] 폴리프로필렌, 폴리에틸렌, 폴리아미드, 바이오플라스틱 등 다양한 종류의 플라스틱 소재를 다양한 기업과 협력하여 맞춤형으로 생산한다.사이클마다 속성을 테스트하고 생산해 보는데 주로 사출과 용융, 주입, 압연, 롤러 등을 이용한 테스트를 시행한다. 기초적으로는 어떤 성분이 포함되는지에 따라 다른 테스트를 거치게 된다.○ [폴리머 사출] 폴리머 사출 실험실은 국제적인 기업으로부터 위탁받은 파이프라인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 파이프는 가정용 식수나 폐수, 가스 수송용으로 사용한다.기업이 대학에 실험을 위탁하는 이유는 기업의 비용이 절감될뿐더러, 위탁에 따른 정부로부터의 추가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현재는 두 개의 폴리머 결합물을 동시에 실험하고 있다. 사출 테스트는 파이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플라스틱 제품 생산과 혼합 충전재 적용이 가능하다.○ [주입 몰드] 주입 몰드 실험실은 엥엘과 협력하는 오스트리아 내의 유일한 연구소이다. 이 곳에서 엥엘의 최신 경량소재 개발 작업을 수행중이다. 이 작업은 전자동 공정으로, 플라스틱 결이 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아주 견고한 작업이다.이 소재는 기존 소재에 비해 50~60% 경량구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에도 강한 특성을 가진다. 이 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폴리카보네이트를 이용한 경량소재로, 350℃까지 견딜 수 있다.주로 항공기에 사용하는데 현재 테스트 중이기 때문에 대형 프레스가 없고 이제 곧 들어올 예정이다. 3D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이 방식이 더 저렴하고 효율적이라고 한다.○ [폴리머 재료 테스트] 이 곳에서는 영속성, 지속성, 내열성 등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한다. 외피가 물이나 오일 성분으로 되어 있는데 검사체 자체의 매개체(석유, 원유 등)를 사용하는데 오스트리아 원유나 정유용으로 사용한다.□ 네트워킹◇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 오스트리아○ 연구소 시찰을 마친 연수단은 부총장, 학장, 쿤스트스토프 클러스터 대표 등과 함께 자유롭게 네트워킹 하는 시간을 가졌다.○ 린츠를 포함한 오버외스트라히 지역은 국제적․지역적으로 유수한 기업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모두 중소기업, 특히 특화된 강소기업이 많다.세계적인 중소기업의 특징은 틈새시장을 공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서는 창업을 하기보다 이들 기업에 취업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원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다.○ 기업이 대학에 투자하여 성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협력성과이겠지만, 실패할 경우에도 학습과정으로 받아들일 뿐 패널티를 주는 경우는 없다. 기업이 대학과 협력하는 것은 대학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인력을 키우는 미래지향적인 이유 때문이다.기업의 핵심 기술을 연구하는 자체 연구센터에는 하이엔드(High-end) 연구시설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협력프로젝트를 통해 연구하던 인력을 당장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실업률이 낮은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산업기술 분야는 늘 인력부족에 시달린다. 일자리는 많은데 일할 사람이 없다.공대 졸업생이 1명이라면 수요인력은 4명인 수준이다. 에기드 부총장은 ‘한국에서 좋은 인재가 오스트리아로 많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대학은 입학은 쉽고 졸업은 어렵다. 일정 수준의 학력을 마친 학생은 원하는 대학이나 학과를 거의 골라서 갈 수가 있다. 등록금도 없다.대학은 국민의 세금과 기업의 지원금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졸업하기 위해 학생이 거쳐야 하는 학사과정과 시험이 어렵기 때문에 적성이나 지식이 없으면 통과할 수 없다고 한다.○ 기업이 학생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능력(Competence)이다. 오스트리아의 대학들은 학생에게 추천서를 써주지 않는다. 훌륭한 인재는 기업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인기학과는 시대별로 달라진다. 지금은 AI가 가장 인기가 많은 학과이다. 인기학과라고 꼭 졸업까지 가는 것은 아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 잘 다니다가도 기업과 협력프로젝트를 하다가 졸업하기 전에 기업으로 바로 취업하는 경우도 있다.○ 졸업생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 들어간다. 아무래도 창업까지 걸리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잘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기업이 워낙 탄탄하다 보니 창업을 고려하는 학생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차이도 없다. 그러다보니 노조의 필요성도 적은 편이다. 1~2년 안에도 없어지는 창업기업이 많은 한국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기업 활동을 한 번 시작하면 거의 50년 이상 지속된다.현재의 중소기업은 다 그런 절차를 밟아 온 사례들이다. 지멘스는 40년 이상 근속해도 승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승진이 보다 용이하기 때문에 중소기업을 가는 경우도 많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기술 발전○ 오픈 이노베이션이 대학과 기업 중 누구에게 중요한 것인지는 무척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는 대학과 연구에 중심을 두고 있다. 하나의 실험을 소재하자면, 건물 하나는 전체 인력에게 개인책상과 사적영역을 제공한다. 다른 건물은 책상과 공간을 모두 공유하며 협업한다.○ 오스트리아는 워낙 강한 기업이 많아서 기존 기업을 뛰어넘으려는 창업기업의 활동이 무척 어렵다. 하지만 대기업이 중소기업이나 창업기업의 기술이나 노하우를 훔치거나 빼앗아가는 일은 없다.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눌리는 일은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창업기업이 너무 잘되어 대기업에 파는 경우는 있다.○ 한국은 산업단지 안에 대학을 설립하여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오스트리아 사이언스 파크는 단지 내에 대학을 들이는 경우는 없다. 실험실 수준의 협력을 한다.대학 안에 연구센터를 짓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오라클이나 아우디도 여기에 들어와 있다. 기업은 기업, 학교는 학교다.◇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오스트리아○ 4차 산업혁명은 시대적인 변화이다. 각 대학마다 주어진 핵심과제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잠재성을 보고 하는 것이지 지금 당장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AI로 인해 발생할 부분을 고려하는 것이다. 미래에 발생할 실업문제나 실패한 로봇 등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다.○ 자동화와 인간 사이의 균형이 문제의 핵심이다. 중도의 길을 찾아야 한다. 기업에게는 현재의 인력을 유지하면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을 핵심문제로 삼고 있다.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인력이 나간다. 기업도 다른 나라로 나간다. 사회적인 도전으로 바라봐야 한다. 로봇은 사람의 일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는 것까지만 해야 한다.지적인 능력은 로봇이 뛰어나다. 사람과 로봇의 공존(Interaction)을 봐야 한다. 우리 대학에는 로봇심리학 분야가 있다.○ “린츠대학에 오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도 한국을 방문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서로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알렉산더 에기드 부총장의 인사로 린츠대학의 방문을 마무리되었다. □ 질의응답- 장학금은 정부장학금인가 외부장학금인지."기업은 당연히 내고, 주정부는 별로 없다. 외국인 대상 장학제도가 많다."- [현장시찰] 테스트 결과물을 볼 수 있는지."물론 볼 수 있다."- 과제를 주는 기업은 지역기업인가 국제적 기업인지."모두 있다. 린츠에만 300개 이상의 플라스틱 관련 기업이 있다."- 기업이 요구하는 최종결과물에 대한 결과치에 대한 인증도 하는지."대학에서 하는 것은 실험용이다."- 기업과 연구와 실험 이외에 공인인증도 해주는지."아니다. 인증기관은 별도로 있다."- 기업 협력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장비는 기업이 제공하는지."연구 목적으로 합의하여 기업으로부터 제공받는다."- 프로젝트 진행에 따라 상위 단계로 올라가면서 필요한 실험장비나 설비는 요청에 의해 제공받는 것인지."그렇다."- 기업의 과제를 해결한 것에 대한 보상이나 혜택은."지원금이다. 하지만 인건비 등으로 재투자하기 때문에 비영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 참가자 일일보고○ 산학연이 잘 구축되어있는 우수 사례로 보인다. 특히 대기업, 중소기업 간의 연구 교류가 활발하며, 연구 분야 별로 융합 연구소가 설치되어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학’의 유기적인 연계가 잘 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특히 청년실업률 등이 없는 점이 인상 깊었다. 한국의 경우, 중소기업은 인력이 부족한데 정작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는 미스 매칭 상황인 반면 오스트리아 특히 린츠에서는 학교, 대학에서 기업과 연계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기업이 원하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능력을 가진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시스템이 우수한 것 같다.○ 교수님과 미팅 시 학생들 모집이 힘들다는 뉘앙스를 받았으며, 학생이 있어야 중소기업에 유능한 인대를 보낼 수 있는 부분이라 고민이라고 생각된다.○ 캐플러 대학의 사이언스 파크는 대학 내 연구센터와 비슷하게 창업을 준비하는 기업에서 시제품 시험 등을 위한 연구 직원을 수행할 부분으로 국내 대학의 창업 지원센터.관련 연구기관 센터 등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다만, 해당 국가의 마인드 등을 현재 우리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린츠 대학의 가장 큰 장점은 협력과 개방이었다. 주요 대기업, 중소기업 간의 R&D 협력체계가 훌륭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분야를 넘나드는 협력으로 다양한 연구개발을 시행하고 있었다.○ 학생 수 30,000에 2,000명의 직원, 300명의 교수진 등 탄탄한 인력과 국가와 산업체의 지원이 원동력이 되고 있다. 특히, 세계 150여 개국의 대학과의 적극적 협력, 개방은 린츠의 마인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스트리아 린츠에 소재한 국립대학으로 린츠지역의 중공업을 기반으로 산학 연계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이다. 특히 플라스틱(Polymer) 분야에 강하다. 일자리가 많아 대학 졸업 후 혹은 졸업 전에도 취업이 이루어진다.○ 기초과학과 공학을 같이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기초과학이 돈이 안 되는 학과로 인식되어 기초연구가 부족하다.○ 클러스터 활성화가 잘되어 있어 연구 및 교류가 활발, 대기업과 대학을 중심으로 기술개발 활성화되어있다. Comet(정부지원 과제와 유사)을 통해 산학연 연계를 통한 기술개발 활성화, 의무적으로 산학연이 연계되도록 컨소시엄 구성 조건이 있음.4년 단위로 과제 수행 최대 12년 가능하다. 과제수행에 대한 평가는 외국 전문가들로 위원을 구성, 기술개발 결과보다 과정 중심으로 평가하여 기술유출 방지한다.○ 기초과학 분야까지 활성화되도록 구성된 대학 교육 시스템과 클러스터를 통한 산학연 연계는 본받아야할 부분이 있다.하지만 한국은 대기업 주도로 산업분야가 이루어져 대기업을 제외할 경우 클러스터가 활성화되기 어렵거나, 대기업을 포함할 경우 기초연구가 미흡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형 클러스터 조성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산학연 협력모델로 보인다. 제품 개발 등 기업의 기술 수요가 대학의 연구소에서 시제품 제작은 물론 학생 취업까지 연계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산학연 간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금 부분도 대부분 기업이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 내에서 운영할 수도 있는 장비, 한국과 달랐다. 기업과 대학의 상호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신뢰가 뿌리가 되어 기업과 대학은 융합하고 그 결과 대학은 신기술과 고급인력을 제공하고 기업은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한국 기업과 대학에게 꼭 필요한 시스템이다.○ 산학 신뢰 구축을 통한 연계‧협력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린츠대학의 경우 각계 분야의 연구결과물이 지역기업에게 선순환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업구조와 다른(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 중심) 중소기업이 강한 구조 특성이 반영되어 쉽고 용이하게 상생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된다,○ 린츠 지역의 플라스틱 산업(린츠지역에만 300여개 기업군 존재)이 클러스터를 이루고, 이를 연계하여 대학이 프로젝트 운영(기술 개발)을 통하여 기업에게 기술이전‧장비 활용-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이 취업까지 연계되는 선순환 체계가 인상적이었다.○ 대전의 경우 출연연과 대학의 인프라가 많으나 기업과의 연계가 미흡한 점이 아쉬우며, 서로간의 신뢰구축과 연계하는 플랫폼 등 활성화가 필요하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기획력 없이 진행되는데 사전에 대학에서 프로젝트가 구성되어 연구되어지고 이러한 강한 기술력을 가진 연구 결과물이 기업에 활용되어 성과로 이어지는 체계가 인상적이었다.○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최첨단 국립대학이다. 또한 등록금이 1학기에 얼마 안 들고 거의 공짜라고 봐야한다.세 번째로 큰 도시이고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수학자 겸 점성술사,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의 이름을 계승한 학교로 이공계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학이다. 산학 기술 연구 프로젝트 등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정말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됐다.○ 기업과 학교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인력 배치의 미스 매칭이 없는 점이 놀라웠다. 특히 10살 때부터 진로가 정해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 기업이 투자하여 기업에 맞는 인력을 양성한다는 듀얼 시스템은 선진 시스템이라 생각한다.○ 린츠 공과 대학 내 연구소로 미래의 신 성장 동력을 구동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4개의 학부과정을 운영하면서 높은 수준의 연구 장비와 산업화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기업과의 공동협력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거의 무료에 가까운 학비로 운영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세계적인 공과대학으로 오스트리아 최초로 Open Innovation Center 설립을 추진했다. LIT Factory를 운영하여 경량 및 고분자기술, 리싸이클링, 업싸이클링, 스마트 생산을 추진하여 대학의 연구 노하우를 기업에 바로 적용하도록 노력하고 있다.유기적인 산학연 협력을 통해 기업의 수요에 따른 기술개발을 대학이 수행하고, 수행한 연구자를 기업에서 채용하게 되는 선순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기조로 인해 일자리의 위협을 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기술개발을 하는 것이지 일자리를 대신하기 위한 개발이 아니라는 철학에 감명받았다.○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은 중공업을 중심으로 산학연의 효율적인 기업지원 및 대학과의 연구개발 및 기술이전을 통한 사업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기술이전에 따른 기술료를 다시 연구개발에 재투자함으로 선순환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린츠대학은 기초과학부터 응용기술까지 연구할 수 있도록 전문연구자를 양성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연구 개발부터 생산까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업을 지원하며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기회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한국은 성과 중심으로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기술개발이 많은데, 기반연구부터 생산까지 신속하고 중소기업에 실질적이 도움이 되는 연구개발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본받아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산학연이 잘 되어있다. 순환구조가 잘 되어있고 기업과 연구를 통한 기술이전을 하는데 기술료 개념이 아닌 학교 투자하는 시스템이다. 기업으로부터 기술료 받고 그것을 다시 연구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여러 기업과 같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해당기술(기업)에 기술이전 우선 대학원은 기업과 같이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해당 인건비 지원(대학원비 무료)한다. 또한 국립대면서 기업(외부)투자가 30%이다.○ 플라스틱 강세이며 관련 대‧중소기업이 북부오스트리아에 많이 있다. 기업(대‧중소)의 봉급 등 차이가 없이 선호기업이 없으며, 실업률이 걱정 없다.(기업 필요 인력보다 고용자 수가 더 많다)○ 4차 산업 관련 준비를 하면서 인간 대체가 아닌 보고개념으로 접근하려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인간과 AI의 균형에 대해 고민해야한다.한국은 AI로 실업률이 더 높아지는 것을 걱정하는데 걱정이 아닌 이상적이라 해도 인간과 시의 균형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이미지는 “관광”이었는데 와서 설명을 들으니 강소기업이 많은 기술 국가였다. 강소기업이 많은 기술 국가의 원동력으로 듀얼시스템을 꼽고 있다.교육체계가 독일과 같이 10살에 아이 진로가 결정된다고 한다.(기술계/인문계) 한국은 진로가 20대에 결정되나 관련 정보가 너무 적은 상황이다.(고용, 안정적 위주) 기술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력확보가 중요하나 독일의 교육체계를 가져오려고 해도 여러 문제로 적용이 어렵다. 기업의 자발적 참여와 정부, 국민의 인식 개선(기술이 중요)을 하여 점차적으로 교육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 산학연 협력의 모범적인 사례로 보인다. 기업이 원하는 기술 개발을 대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부분 자금을 기업이 제공하고 향후 기업은 연구자를 취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 운영되고 있다.○ 대학은 연구 결과에 대하여 제재 받지 않고 학생 취업에 대해서도 걱정 없이 해오고 있다. 대학 교수가 학생들의 취업을 위해 추천서 등을 쓰지 않아 실력으로 시업 등에 취직하는 분위기다.○ 학제 간 소통‧협력을 통한 오픈 이노베이션을 준비 중에 있다. 미래 사회에 대해 준비하지만 사람 중심의 마인드로 철학적인 문화적 기반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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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격차는 공중(The Public)에게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다.” 『영웅전』의 저자인 로마시대 그리스인 철학자 플루타크의 말이다. 무려 2천년의 세월을 넘나든 이 철학자의 위대한 통찰력에 깊은 경외감을 느낀다.그렇다. 플루타크의 말은 단순히 수사가 아니다. 빈부격차는 실제 건강격차를 낳는다. 울산대 의대 강영호 교수의 연구를 보면 서울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은 서초나 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른 동네에 따라 사는 이들의 수명의 차가 나타나는 것이다.가난은 질병의 원인이며 질병은 많은 이들을 가난에 빠뜨린다. 가난과 질병 그 악순환의 고리다. 기실 소득 직업 학력 등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가 건강격차를 낳는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는 국내서도 수없이 많다.30-69살 남녀 8414명을 대상으로 4년 동안 사망여부를 추적해 교육수준이 고졸미만인 사람은 고졸이상인 사람보다 사망할 위험이 1.9배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한 2003년 중졸이하 저학력의 흡연율은 대졸이상 남자 고학력층에 비해 10-38% 높게 나타난 연구도 있다.건강행태에서도 학력과 소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질병의 발생 자체가 소득계층 간에 불평등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인 연구도 있다.제주대 의대 이상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암의 경우 남자 저소득층 20%가 상위 20%에 비해 암 발생률이 1.65배 높았다. 암 환자를 3년 동안 추적 관찰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소득구간을 5구간으로 나눴을 때 최하 소득계층이 최상 소득계층보다 유의하게 더 많이 죽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방암의 경우 2.13배였다.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려 3배나 더 많이 죽었다.이른바 우리 사회의 건강불평등 현상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일찍 죽게 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이 문제를 방치할 것인가? 우린 언제까지 이를 그냥 두고 봐야만 하나? 이는 윤리적으로 부당하다. 한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의료이용에서도 이런 불평등이 뚜렷하며 이 또한 건강불평등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일수록 병에 더 잘 걸린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더 절실히 치료가 필요하다. 의료필요가 더 많은 것이다.하지만 의료이용 총량을 살펴보면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의료서비스를 더 적게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용하는 의료서비스의 질도 소득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위암 자궁경부암 유방암의 경우 가난한 이들에게서는 이를 대체로 늦게 발견한다.암의 경우 조기발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는 생명과 직결된다. 특히 위에 열거한 암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들 암은 조기에 발견해 손을 쓰면 생존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암에 대한 조기건강검진의 기회를 더 자주 더 많이 주어지게 한다면 적잖은 이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게 아닌가?2007년 대선의 해 대선주자들의 다투어 이런저런 정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정작 국민의 기본권인 건강권의 차별이 이렇게 현저하게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를 정책으로 제시하는 대선주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고도 한국사회가 인권사회라고 할 수 있나?이런 배경에는 우선 정부의 태도와 의지부족이 적잖은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건강불평등에 관심을 보인 것은 아주 근년의 일이다. 그것도 언론과 학자들의 제기가 있자 마지못해서다.<한겨레>가 이 이슈를 제기할 무렵 복지부는 공식 보도자료까지 내어 사회문화관계장관회의에서 다루겠다며 반짝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일시적 관심과 선언적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주무부처가 이러한데 다른 부처 특히 경제부처나 정치공학에만 빠져있는 정치권은 오죽하겠는가?이런 상황에서 건강불평등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한 복지부 관리는 기획보도 당시 <한겨레> 취재진의 물음에 “건강형평성 방안에 대해 고민은 했지만 아직 형평성 측정 잣대라든지 형평성 달성을 위한 근본인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건강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시각도 큰 원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건강은 개인 또는 개인이 하기에 달렸다고 본다. 이게 일반적 통념이다. 부모한테 얼마나 좋은 유전자나 체력을 타고 났나? 비록 허약체질이더라도 얼마나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했나? 얼마나 좋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나? 한 사람의 건강은 바로 이렇듯 그 당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기실 이런 개인적 관점은 건강을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보는 눈을 가로막는다. 그저 개인적이고 당연한 일을 또 궁극적으로 해결 가능하지도 않는 개인적 일을 두고 웬 호들갑이냐는 식이다.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없으니 정부 정책으로 이를 풀어야 한다는 시각에도 뚱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관점으로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건강문제를 궁극적이며 본질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개인적 관점은 왜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 전체적으로 건강한지 왜 영아를 비롯한 어린이 사망은 가난한 곳에 더 많은지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건강하지 못한지 등을 설명하지 못한다.소득수준 재산 직업 인종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개인의 태생적 조건 못지않게 사람들의 건강에 깊이 영향을 끼친다는 보고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상식’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식으로 사회정책 또는 국가정책으로 이를 풀어야 한다는 논지 또한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건강불평등을 낮추기 위해서는 우선 의료의 문턱을 대폭 낮춰야 한다. 장벽을 없애야 한다. 누구나 의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적어도 돈이 없어 의료이용을 제대로 못하는 건 없애야 하지 않겠나?의료보장 체계의 획기적인 개혁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더 높여야 하며 누구나 자신의 지근거리에서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최저생계비,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며 소득을 일정하게 보장해주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보편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한마디로 보편적 복지국가가 돼야 건강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참여정부 들어서는 건강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주력하기 보다 엉뚱하게 이를 악화시키는 의료산업화 논의가 더 무성했다. 보건의료의 영역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신자유주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양극화의 문제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그 극심한 양상의 핵심적 증거인 건강불평등 현상에 대해선 구체적이고 실천력 있는 어떠한 의미 있는 정책도 없었다.건강불평등 문제 해결의 노력은 어쩌면 한 사회의 인권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은 건강은 누구나 누려야할 인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선언은 25조에서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해 자기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일찍이 “모든 이에게 건강을!”이란 구호를 내세우며 건강불평등 문제를 정책목표로 세우기도 했다.한국사회도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35조에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적어도 개인적 수준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건강불평등이 악화하는 상황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은 사회발전은 물론 인권적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전 건강형평성학회장인 조홍준 교수 (울산대 의대)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건강불평등 더는 ‘개인’의 책임으로 두고 방기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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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대(東京大)에 따르면 2022년 9월 19일 코쿠분 코이치로(分功一郎) 철학교수 연구실 주도로 아베 전총리 국장에 관한 논의를 진행했다.논의에는 주최자인 코쿠분 교수를 포함해 정치 철학자와 변호사들이 참석했다. 해당 논의는 유튜브에 실시간 중계됐으며 약 3200명이 동시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코쿠분 교수는 국장이 실시되기 전에 아베 정권의 문제점을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고 개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아베 정권의 공무서 파괴를 지적하며 국장은 이러한 정권을 완성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쿄대 이시카와 켄지(石川健治) 헌법학 교수는 조직법에 추가로 국장법(国葬法)까지 만들지 않더라도 이번 국장은 가능했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야마구치 히로시(山口広弁) 변호사는 구 통일교와 깊은 연관이 있던 전 총리의 국장은 사이비 종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야마구치 변호사는 구통일교 신자와 그 가족의 구제에 힘쓰고 있다. ▲ 도쿄대(東京大) 전경(출처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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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요즘 우리 사회를 달구는 핫 이슈가 있다. 바로 능력주의와 공정경쟁이다. 치열한 경쟁 판에 갇힌 2030 세대에선 더욱 논쟁적이다. 재빠르게 이슈를 선점한 눈치 빠른 30대 정치인이 당대표로 진입하는 계기를 터준 이슈이기도 했다. 불공정의 역사는 길었으되 공정 이슈는 눈앞 현실이고 보니, 누구도 그 간극을 명쾌하게 정리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포퓰리즘에 이용될 여지가 많다. 공정경쟁을 말하려면 불공정의 과정부터 살펴야능력주의 논쟁을 무색하게 하는 사건들도 넘쳐난다. 화장실 유독가스로 2명 사망, 옥상에서 전신주에서 페인트칠하다가 추락,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항만 노동자, 날마다 통계에 잡히다시피 일어나는 총알 배송 택배·배달 노동자들의 사망·사고들이다. 깔리고 떨어지고 돌에 맞고 질식하고, 마치 전시 상황과도 같은 노동 현장의 참극들이다. 문득 의문이 스친다. 이들이 일하는 그 노동 현장은 공정한 환경인가? 목숨을 감수해야만 할 위험 노동을 거부할 순 없었을까? 그렇다. 생존 현장의 그들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정성 논쟁이 한창인 우리 사회가 서있는 불공정 경쟁의 기반이다. 젊은 청년 김용균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사건에 분노하며 떠들썩했던 것도 잠시였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망과 사고들 앞에서 그 분노는 다시 사그라지고 있다. 공정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울어진 운동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내놓은 2018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저소득층은 정부의 조세재정 정책에도 불구하고 80.5%가 여전히 저소득층으로 남아 있고 빈곤 탈출률은 OECD 28개 회원국의 평균 빈곤 탈출률인 64.1%에 견줘 절반 수준에도 한참이나 못 미치는 19.5%로 꼴찌를 기록했다(조세재정 정책의 소득재분배 효과 국제비교 보고서). 세대별로는 20대 빈곤 탈출률은 11.7%(OECD 평균은 42.7%), 30대 17.2%(OECD 평균 45.7%)로 우리나라는 좀처럼 빈곤에서 탈출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처럼 부의 불평등은 단순한 자산 및 소득 불평등을 넘어 사회 전반의 불평등 구조로 이어져 출발선 자체를 왜곡시켜 왔다. 당연히 우월한 경쟁 기반의 계층들이 대를 이어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는 구조이고, 그 기회는 다시 부의 왜곡을 심화시킨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우대 제도’들은 이런 불공정 기반을 개선하기 위한 분야별 정책 중의 하나다. 가부장제 하에서 법적·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성의 권리와 사회 참여의 기회를 점차 확대해 공정한 기반을 만들자는 것이 취지다. 장애인할당제, 지역인재할당제, 청년할당제도 같은 기능을 한다. 지금까지 이런 제도들이 제대로 운영되어 왔는지 여부를 넘어 이 정책들 자체가 불공정한 기반이고 역차별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합리주의를 가장한 넌센스다. 능력주의와 공정경쟁에 관한 논쟁에서 이런 제도들이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인간 사회에서 모두에게 늘 완전한 공정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책적 배려를 통해 지속적으로 시정·보완해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정하고 보완해가는 과정에는 늘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적 격차가 따르게 된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조정 당시의 개인들이 불공정을 경험하게 되는 지점이다. 최근의 여성우대 정책들이 논쟁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성에 대한 불공정한 사회 기반은 고용·경제 상황이 다소 여유가 있었던 산업화 세대에 주로 형성되었다. “불공정 구조를 만든 건 기성세대인데 왜 치열한 경쟁 속에 허덕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문제를 떠넘기고 강요하는가”라는 지점이 2030세대 남녀 갈등의 핵심인 듯하다. 이처럼 불공정 기반의 수정 과정은 쉽지 않은 문제다. 생각해보면, 과거 노예노동으로 엄청난 부를 착취해오던 미국 남부의 농장주들도 노예제의 폐지를 엄청난 불공정으로 인식했다. 가까이는 얼마 전 떠들썩했던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가 그랬다. 인국공의 보안검색 요원 직접고용에 대한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가 아니라며 각하 처분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불복해 소송이 제기됐지만 법원 역시 인권위 처분이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물론 법적 판단이 모든 문제를 정리해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취업의 문턱이 곧 생존의 문턱이 된 민감한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법적 잣대가 아닌 이해와 협의 과정이었다. 그 점에서 법정으로 가져가는 빌미를 준 정부에 많은 책임이 있다. 충분한 대화와 논의는 물론이고, 과정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준비도 없이 진행된 명령 하달 방식의 부작용을 고스란히 드러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공정한 사회로 가는 과정의 어려움을 체험했다는 점에서는 앞으로 교훈 삼을만하다.경쟁 판의 교정 작업, 경쟁 논리로는 가능하지 않다대한민국 헌법은 제32조에서 근로의 권리와 근로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덧붙여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라고 명시한다. 이어 제34조에서는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35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규정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근로환경,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는 개인이 경쟁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권리임을 명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죽어가지 않을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권리를 챙겨먹지 못했으니 스스로의 무능을 탓해야 할까? 목숨을 걸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일, 오물 등 폐기물을 청소하고 운반하는 노동, 가족조차 견뎌내기 힘든 돌봄 노동, 모두 힘들고 위험하고 위생적이지 않아 피하고 싶은 노동들이다. 그러나 이런 노동 없이 인간은 한시도 살아갈 수 없고, 사회는 굴러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노동들을 더 대우해야 공정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능력주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노동을 당연하게 여긴다.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된 그 노동들은 바로 능력 만능주의 사회를 지탱할 기반쯤으로 인식되고 있다. 고되고 위험한 노동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들,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대학을 포기하는 젊은이들, 바늘구멍보다 작다는 취업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다시 결혼과 육아를 포기해야 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말하는 능력의 기준은 무엇이고 능력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능력이고 누구를 위한 능력일까? 극단적 소외계층에게 기회를 확대하는 제도는 어느 시대에서나 있었고 필요한 제도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모두에게 항시적으로 완벽하게 작동할 수 없어서 그렇다. 국가마다 다양한 복지 정책들은 이런 불평등 구조를 완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도 세금 혜택을 받는 것도 기부나 적선 행위가 아니라 공존을 위해 끝없이 교정해가는 비용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공정한 사회는 능력주의보다 과정을 이해하는 사회“미국인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틀렸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밥도 못 먹고,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학교에도 못 다니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속 편하게 살 수 있나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Where to Invade Next?)’에 나오는 대사다. 미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아이슬란드 여성 CEO의 답이다. 능력주의 사회일수록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긴다. 현재의 결과에 대해 온전히 개인들이 책임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여가부(여성가족부)를 둔다고 젠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통일부를 둔다고 해서 통일에 다가가지 않는다면서 여가부도 통일부도 없애라는 정치인이 있다. 모든 제도를 기능적으로만 이해한 탓에 과정은 무시되고 단기적 결과만을 중시한 근시안적 사고다. 이 사회가 ‘인간을 위한 사회인지 기능을 위한 사회인지’의 지점에서 헛갈리는 것은 아닐까? 이는 자본주의적 부와 결과를 창출하지 못하는 모든 조직과 사람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원리와 같다.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면 날선 비판과 개선책을 제시해야지 존재 자체를 없애라고 한다. 국정 운영에서조차 치열한 경쟁자적 마인드로 임하고 있는 듯하다.이런 논리는 그들이 만든 ‘능력 기준’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을 계층화하고 퇴출시키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가족 제도가 있다고 인구절벽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지금의 가족 제도 역시 당장 해체해야 마땅한가? 필요에 의해 생긴 제도라고 해도 수명이 다하면 언젠가 폐지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제도를 없애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단순명료함은 많은 생각이 필요 없으니 자칫 공정해보일 수 있으나 복잡한 인간 사회와 인간의 가치를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지를 가르치고 아이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이들에게 시험 잘 보는 법을 가르친다면 사실 가르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영화 속 핀란드 수학교사의 말이다. 능력주의와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인 어느 정치인은 그 수학 선생님이 수학은 안 가르치고 엉뚱한 걸 가르치고 있으니 수학과목을 없애고 싶을까? 능력주의가 ‘인간의 가치’ 그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능력주의, 합리성, 효율성은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 필요한 도구일 뿐이며, 인간을 넘어서 그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다.삶의 정치를 실현한 공간,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경쟁이 치열하다는 말은 나눌 몫이 작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자신이 감당할 정도의 경쟁 수준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도 없다. 능력주의가 경쟁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피곤함을 무릅쓰고 경쟁의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가. 사회를 운영할 제도와 법률을 만드는 정치권, 국회가 고민할 문제들이 태산이다. 그런데 이들이 앞장서 경쟁주의와 능력주의를 부추기고 있어 안타깝다.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을 사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세 가지로 분류했다.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생존 활동인 ‘노동’은 전적으로 사적 영역이며, 인간들의 노력으로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하는 제작인의 행위인 ‘작업’은 유용성이 지배하는 활동이다. 사람들은 이 노동과 작업을 기반으로 인간들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인 ‘행위’를 하며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보편적 인간(a man)이 아닌 복수의 인간(men)을 전제로 하며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공적 영역에서의 삶이다. 아렌트는 근대의 인간이 생존의 필요성에 치우쳐 그에 예속되면서 동물성 유지 이외의 인간성 발휘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능력주의는 인간의 다원성, 복수의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원성을 인정하려면 공론의 장이 필요하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시민은 노동과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듯이 정치적인 삶은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들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능력이 권력이 되어 좌우를 나누고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정치는 진정한 ‘정치’가 아니다. ‘작업’의 영역에 머물러 있거나 먹고살기 위해 경쟁하는 ‘노동’의 활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다.인국공 사태에서처럼 우리 삶이 법정에서 결정되는 방식은 사적 영역인 노동이나 작업의 영역(인간이 만든 법률 등)에 삶을 내맡기는 방식 아닐까? 아렌트에 의하면 복수의 인간들이 서로 문제를 드러내고 공론화하고 활발하게 토론하고 타협해 조정해가는 정치적 활동을 통해 해결할 문제였다. 이런 활동적 삶을 살려면 빈 공간이 필요하고 모두가 조금씩 양보할 준비도 필요하다. 바둑판처럼 빈틈없이 짜여 촘촘히 얽혀있는 지금의 사회 구조에서는 노동·작업의 삶을 넘어 ‘행위’하는 삶을 살 공간을 만들 수 없다. 젊은 세대에게 그런 공간을 내주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기성세대에 있다. 그런 촘촘한 구조에서는 능력주의조차 실현해내기 어렵다. 자신들도 어쩌지 못하는 치열한 경쟁 판에서 공간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 기성세대가 먼저 틈을 내주어야 한다. 북극의 빙하도 한번 갈라지기 시작하면 뱃길이 열리듯이 일단 틈만 생기기 시작한다면 공간으로 이행하기는 쉽지 않을까?※ 김진희는 공인노무사로 ‘노무법인 벽성’에서 대표를 맡고 있다. 복지국가의 노동 정책, 경제민주화와 노동권 강화가 주된 관심 분야이며,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김진희 (노무법인 벽성 대표) webmaster@parang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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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9생략- 가사노동의 종류와 내용은 다양하여, 처리해야 할 일이 계속해서 생기므로 시간과 노력이 담당자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데, 사회적 생산을 위한 노동력 생산에 불가결함에도 불구하고 가정 내부에서의 사적노동에 지나지 않고, 게다가 직접 임금으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경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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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1디저트(Dessert)는 본래 프랑스어로 '식사를 끝마치다', '테이블을 치우다'는 의미의 데세르비르(Desservir)에서 유래한 말로, 주 식사(메인 코스)가 끝난 뒤 가볍게 즐기는 음식(후식)을 말한다. 디저트는 소크라테스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시인들이 토론을 한 뒤, 식사를 함께 하면서 마지막으로 치즈나 말린 무화과 등의 과일을 즐긴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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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0‘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게으름을 경계하는 말이지만 이제 한물 간 옛말이다. 먹을 자격인 일(취업이든 개업이든)할 의무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사회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자연력에 의존했던 농경사회의 생산력의 한계가 드러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급격하게 올라갔던 산업사회에서도 가난의 대물림은 한동안 걱정거리였다. 높아진 생산력의 결과가 고루 돌아갈 사회제도와 복지시스템을 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난마저도 이제 맘대로 대물림할 수 없는 시대다. 3포, 5포, 7포의 좌절을 겪은 청년들에게 결혼과 양육은 이제 자발적 의지의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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